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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 증시, 유력 기업 잡으려 상장 조건 속속 완화

    모기업·자회사 동시 상장에 예외, 의결권 차등 `종류주`도 허용

    기사입력 2018-03-19 16:01:44 | 최종수정 2018-03-19 16:01:49
    기업의 신규 주식공개(IPO) 규정이 유명무실해질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 기업이 자사에 유리한 조건을 받아들이는 증권거래소를 선택함으로써 상장 협의의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어서다.

    거대 IT(정보기술) 기업들은 이미 증시에 상장되지 않은 유망기업을 경쟁적으로 인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거래소마저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상장 조건 완화를 추진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 상장기업의 거버넌스가 왜곡돼 시장 자체의 매력을 떨어뜨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19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에 따르면 도쿄(東京)증권거래소를 거느리고 있는 일본거래소 그룹은 요즘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SBG) 회장 겸 사장이 밝힌 휴대전화 회사 소프트뱅크 상장계획을 받아들일지를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SBG는 도쿄와 런던 거래소 동시상장을 추진한다는 방침이지만 도쿄 거래소 내부에서는 2조 엔(약 20조 원) 규모에 달할 이 대형 안건을 별로 반기지 않는 분위기다.

    모기업과 자회사 동시상장은 주식 상호보유와 함께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일본의 독특한 자본조달 방법이다. 동시상장은 모기업이 자체 이익을 우선해 자회사 일반주주의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해외투자가들은 이를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도쿄 거래소는 2007년 소프트뱅크처럼 수익의 대부분을 올리는 핵심기업의 동시상장에 부정적인 입장을 밝혔었다. 이번에 동시상장을 받아들이면 기존 방침을 변경하는 셈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기존 방침을 고수하면 유력 기업의 IPO를 외국 증권거래소에 빼앗길 우려가 있다. 런던 증시에 단독 상장할 경우 "자국 대기업도 외면한 증시"라며 세계적 평가가 떨어질 우려가 있어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 점을 간파한 SBG는 상장 조건 완화를 압박하고 있다.

    도쿄 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의 자회사가 1부에 상장할 경우 모기업의 상호보유 주식비율을 65% 미만으로 낮추도록 규정하고 있다. 경영상의 중요한 결정을 단독으로 할 수 있는 "3분의 2"가 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다.

    다만 상장을 추진하는 기업이 해외증시에 상장된 경우 규정을 완화한 사례는 있다. SBG는 런던 동시상장을 통해 예외규정인 '울트라 C' 규정을 적용받아 상장 후에도 70% 정도의 주식을 계속 보유한다는 복안이다.

    도쿄 증시가 이 예외규정을 만든 건 중국 '알리바바 쇼크' 때문이다. 알리바바는 기업 거버넌스를 이유로 홍콩거래소 상장이 거부되자 2014년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국경을 초월해 기업이 시장을 선택하는 시대의 도래를 알린 알리바바의 사례에 충격을 받은 도쿄 증시는 예외를 인정하는 규정을 마련했다.

    외국 증권거래소들도 다투어 규정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알리바바를 놓친 홍콩거래소는 지난달 창업자가 의결권을 많이 갖는 특수한 주(종류株)를 발행하는 기업의 상장을 인정하는 규정을 제정했다. 이를 활용해 중국 스마트폰 제조업체인 샤오미(小米)가 상장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1월에는 아시아의 성장기업 유치에 관심이 높은 싱가포르 증권거래소도 종류주를 허용키로 했다.

    런던 증권거래소도 사상 최대 규모의 IPO가 될 것으로 보이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 유치를 겨냥, 국유기업을 위한 특별 상장 규정을 마련키로 했다.

    세계적인 자금 과잉도 기업 우위를 뒷받침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IPO는 그동안 성장에 필요한 자금조달이 주목적이어서 신주를 사주는 투자가의 이익보호가 최우선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자금수요가 줄어 기존주주의 환금기회 확보를 우선하는 추세다. 세계 최대의 음악배급 업체인 스포티파이(spotify)가 4월 3일로 예정하고 있는 뉴욕증시 상장에서는 신주를 아예 발행하지 않는다.

    세계적인 자금 과잉으로 IPO가 신흥기업의 몇 안 되는 자금조달 수단이던 시대도 바뀌었다. 애플, 알파벳(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페이스북 등 미국 IT 공룡 5개사에 SBG와 중국 텐센트(騰迅·텅쉰), 알리바바를 더한 거대 IT 8개사는 엄청난 자금력을 바탕으로 유망 벤처기업을 속속 인수하고 있다.

    올해 1~3월 IPO를 통한 세계의 자금조달액은 337억 달러(16일 현재)다. 같은 기간 이들 IT 8개사가 같은 기간 쏟아부은 인수대금은 249억 달러에 육박한다. 상장기업의 비공개화도 늘어 작년 말 미국, 일본, 영국의 상장기업 수는 약 1만1천500개로 20년 전에 비해 2천200개나 줄었다.

    네덜란드 공적연금 운용부문인 APG에셋메니지먼트의 YK 파크는 "주주의 권리는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한다"며 종류주 증가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투자가들에게는 운용난이 더 절실한 문제다. 거버넌스 문제에 다소 눈을 감더라도 넘치는 자금을 IPO에 투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0여 년간의 자금 과잉으로 세계 주요 증권거래소는 자사를 증시에 상장해 공익을 지키는 비영리법인에서 주주 이익을 추구하는 영리기업으로 변신했다. 니혼게이자이는 투자가와 기업 사이에서 시장 규칙을 유지하는 게 거래소의 본래 역할이라는 점에서 투자가와 기업의 이해 균형을 다시 생각할 때가 됐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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