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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입김 약해진 틈타 동남아 스트롱맨 마이웨이

    필리핀·태국·미얀마·캄보디아…인권·언론 탄압 철권통치
    `아메리카 퍼스트` 트럼프, TPP탈퇴하며 노선 바꾸자
    中, 차이나머니로 동남아서 영향력 확대

    기사입력 2017-11-10 23:54:26 | 최종수정 2017-11-13 09:19:11
    동남아시아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처럼 철권통치를 앞세우는 '스트롱맨'들이 연이어 등장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와 고립주의를 표방하는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동남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그 공백을 중국이 메우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동남아 스트롱맨의 대표 격인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지난해 6월 취임 직후 마약과의 전쟁을 선언하고 지금까지 3900여명의 마약 용의자들을 사살했다. 인권을 무시한 초법적 조치와 폭언에 필리핀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베트남 다낭에서 열리는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직전에도 두테르테 대통령은 국제사회를 향해 "인권문제 등 내정에 간섭하지 말라"며 으름장을 놨다.

     '미얀마 민주주의 영웅'이라 불렸던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자문역은 로힝야족 유혈탄압 이후 '독재자'라고 불리고 있다. 수치 국가자문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지난 6일 로힝야족 인권침해에 대한 의장성명을 발표하자 8일 "안보리가 로힝야족 문제를 꼬이게 만들고 있다"고 맞받아쳤다.

    미얀마군의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탈출한 이슬람계 소수민족 로힝야족 난민들이 난민캠프에서 음식물을 배급받기 위해 줄지어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AP연합뉴스]
    ▲ 미얀마군의 탄압을 피해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탈출한 이슬람계 소수민족 로힝야족 난민들이 난민캠프에서 음식물을 배급받기 위해 줄지어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캄보디아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제1야당 대표를 국가반역 혐의로 구속한데 이어 당의 강제해산을 압박하고 있다. 훈센 총리는 "제1야당인 캄보디아구국당(CNRP)이 이달말 확실히 해체될 것"이라며 "100명 넘은 야당 정치인이 여당인 캄보디아인민당(CPP)로 빨리 전향하지 않으면 정치활동을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훈센총리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언론사에 세무조사를 실시해 재갈을 물리고 시민단체 활동도 통제하고 있다.

     올들어 공직자를 대상으로 반부패 사정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 정부는 지난 7월 국영 석유가스공사의 자회사인 페트로베트남건설 찐 쑤언 타인 회장을 회사에 1000억원대 손실을 끼친 혐의 등으로 체포했다. 이는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정치적 망명을 신청하기 위해 독일에 도피한 타인 회장을 베트남 정보요원이 납치했다며 독일 정부가 인권탄압 문제를 제기한 것. 뉴욕타임스(NYT)는 "유럽연합(EU)은 인권과 노동자 권리를 외면하는 베트남 정부의 독재를 우려해왔다"며 "오랫동안 추진해온 EU-베트남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2014년 쿠데타로 군부정권이 들어선 태국도 지도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기소한 단체와 개인이 280여명에 달하고 5명 이상 모이는 정치집회도 금지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동남아 스트롱맨의 공통점은 미국 대신 중국에 기대고 있다는 점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난 4월 자신의 이름을 딴 경제 정책인 '두테르테노믹스'를 발표했다. 필리핀 정부가 향후 3년간 3조6000억 페소(약 71조원)을 들여 철도망 등 인프라스트럭처를 깔아 경기를 부양겠다는 구상인데 여기에 관여하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중국과 갈등을 겪어온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대신 중국 정부로부터 '차이나머니'를 두둑하게 챙겼다.

     미얀마와 캄보디아는 넉넉하지 않은 국가 재정 때문에 중국의 돈을 끌어와 도로·항만 등 인프라를 정비하고 있다. 중국은 미얀마와 캄보디아에 대한 최대 원조국이다. 태국 역시 2006년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미국과 멀어지자 중국과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원조 수혜국이었던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해외원조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독재자들이 늘 그래 왔듯이 이들도 장기집권을 노리고 있다. 필리핀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난 5월 극단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는 테러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 섬에 계엄령을 선포하자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시절의 '데자뷔' 라는 얘기가 나왔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재임시절 필리핀 전역에 첫 계엄령을 선포하고 21년간 독재자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독재와 마약용의자에 대한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P연합뉴스]
    ▲ 필리핀 마닐라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의 독재와 마약용의자에 대한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AP연합뉴스]


     32년째 집권하고 있는 훈센 캄보디아 총리는 최근 "10년 더 집권하겠다"고 선언했다. 육군 사령관 출신 프라윳 찬 오차는 태국 총리는 내년 총선에서 민주주의를 복원시키겠다고 약속했지만 총선 후에도 향후 5년간 군이 정치에 관여하는 헌법안을 통과시켜 군부집권 장기화의 길을 마련했다. 베트남 정부가 벌이는 반부패 척결운동은 지도부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적(政敵)을 숙청하는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일본 공영방송 NHK는 "'1인 체제'를 완성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강대국 스트롱맨의 행보와 다를 게 없다"고 지적했다.

     동남아 스트롱맨들이 등장한 가장 큰 이유는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세계질서에서 미국의 장악력이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바마 정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정책, 외교, 무역, 안보를 포함해 아시아를 중시하는 '리밸런스(재균형)' 전략을 썼다. 이에 비해 트럼프 정부는 미국 영향력의 근간을 이룬 민주주의·인권·자유 등 미국 가치를 경시하고 독재자들을 칭찬하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트럼프 정부가 동남아와의 자유민주주의 동맹을 약화시고 더 대담하게 나쁜 행동을 하도록 만들고 있다"며 "중국이 미국 민주주의를 깎아내리고, 더 많은 나라들이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를 따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임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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