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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박이 날 줄 알았는데…"
    아세안 진출 日기업의 반성문

    일본 기업들이 겪은 6억 인구 아세안 시장의 `함정`
    구매력 갖춘 신흥 중산층 등장…소비 성향은 제각각
    브랜드 인지도 중요하지만…라이프스타일에 더 주목해야
    `현금 없는 사회`로 빠르게 진화…디지털화에 대비해야

    기사입력 2018-08-09 17:02:37 | 최종수정 2018-08-22 17:17:09
     "일본 특색을 강조하면 잘 팔릴 줄 알았는데 환상이었다."

     "고부가가치 상품을 내놨지만 신흥 부유층은 꿈쩍도 안 했다."

     일찍부터 '기회의 땅' 아세안에 진출한 일본 기업들이 고백한 반성이다. 인구 6억명의 거대 시장, 5% 이상의 높은 경제성장률, 국가간 돈독한 외교 관계와 일본에 대한 좋은 이미지 등 덕분에 아세안에서 크게 성공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좀 달랐다.

     9일 일본 주간지 닛케이 비즈니스에 따르면 아세안에 둥지를 튼 일본 기업들이 고전하고 있다. 아세안 시장에서 일본 기업들의 상품·서비스 점유율이 떨어지고 있다. 삼성과 LG, 알리바바 등 후발주자인 한국과 중국 기업은 물론 아세안 토종 기업에도 밀리는 모습이다.

    ◆구매력 갖춘 신흥 중산층 사로 잡아야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아세안 주요 6개국(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에서 2009년 텔레비전의 최고 강자는 일본 가전제품 대표 기업인 샤프였다. 당시 시장 점유율은 19.3%를 기록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2018년 아세안 텔레비전 시장은 한국 기업이 꽉 잡고 있다. 삼성이 시장점유율 26.3%로 1위를 차지했고, 2위는 LG(24.8%)였다. 한 때 기세등등했던 일본은 소니가 3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시장점유율은 7.6%에 불과하고 샤프는 그 사이 대만 홍하이그룹에 인수되면서 순위가 4위로 밀린데다 시장 점유율도 6.5%로 쪼그라들었다. 스마트폰도 2009년 핀란드 노키아와 캐나다 블랙베리에 이어 3위였던 삼성은 9년 뒤 30%에 가까운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며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2009년 당시 5위였던 소니는 올해 시장 점유율이 1%대로 순위조차 들지 못했다.
    태국 방콕 시내의 한 쇼핑몰. 일본 브랜드보다 삼성과 LG 등 한국 기업의 브랜드를 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사진제공=매경DB>
    ▲ 태국 방콕 시내의 한 쇼핑몰. 일본 브랜드보다 삼성과 LG 등 한국 기업의 브랜드를 더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사진제공=매경DB>


     세탁기와 냉장고에서도 일본 기업이 기를 못펴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맥주나 화장품, 의류 등에서도 태국·베트남·필리핀 등 아세안 토종기업들이 약진하면서 일본 기업들은 명함조차 못 내미는 상황이다. 자동차만 도요타, 혼다, 다이하츠공업 등 일본 기업들이 꾸준히 독점하고 있다.

     닛케이 비즈니스는 "도시바, 샤프, 산요전기 등이 다른 아시아자본에 넘어가면서 일본 기업의 존재감이 약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2010년께 한국·중국 기업들이 보급형 제품으로 아세안을 공략하자 일본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내놓으면서 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아세안 소비 시장을 주도하는 소비자들은 부자가 아니라 이제 막 구매력을 갖춘 신흥 중산층이다. 이들은 고가의 물건보다 좀더 친숙한 보급형 제품을 선택한다. 닛케이 비즈니스는 "한국과 중국 기업은 보급형 제품을 통해 중산층 고객을 확보했지만 일본은 놓쳤다"며 "보급형 제품에서 승리해야 고가 제품에서도 승산이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브랜드 인지도에 집착하면 낭패

     아세안에선 기업이나 상품의 인지도가 매출로 직결되지 않는다. 삿포로 맥주를 생산하는 삿포로홀딩스는 2011년 일본 동종업계에서 유일하게 52억엔을 투자해 베트남 호치민 인근에 생산공장을 설립했다. 내년까지 맥주 생산량을 15만 ㎘까지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과 달리 지난 7월 현재 6만㎘만 생산하고 있다. 맥주 수요가 받쳐주지 않아서다. 삿포로홀딩스는 '동네 구멍가게'까지 영업망을 확대해 '삿포로 맥주'에 대한 인지도를 거의 100%까지 끌어올렸다. 그런데 문제는 베트남 사람들은 평소 마시는 맥주만을 선택하는 경향이 회사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던 것이다.
    맥주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베트남에 공장을 세운 삿포로홀딩스가 현지 한 상점에서 판촉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닛케이 아시안 리뷰 캡처>
    ▲ 맥주를 생산하는 일본 기업 가운데 유일하게 베트남에 공장을 세운 삿포로홀딩스가 현지 한 상점에서 판촉행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닛케이 아시안 리뷰 캡처>
    닛케이비즈니스는 "아세안에선 인지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며 "삿포로홀딩스는 수십만 개의 영세 상점에서 철수하고 대형 체인스토어에 집중하는 등 유통망을 축소했다"고 전했다.

    ◆'메이드 인 재팬' 무조건 팔리는 시대 끝

     아세안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에 대한 동경심이 있다. 그렇다고 언제나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이세탄미츠코시홀딩스가 쿨 재팬 민관펀드와 공동 투자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선보인 '이세탄 더 재팬 스토어'가 가장 대표적인 실패 사례다. 이세탄이 진심으로 손님을 접대한다는 뜻을 담은 '오모테나시' 등 일본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상품을 선별해 진열해 놨지만 매장에 손님보다 직원이 더 많다. 매출 목표는 35억엔이었지만 작년 절반인 16억엔을 기록했고 영업이익은 적자를 냈다. 일본 브랜드라서 무조건 팔리는 시대는 끝났다는 게 닛케이비즈니스의 진단이다. 아세안 소비자들은 '메이드 인 재팬' 에 담긴 품질과 상품에 대한 일본 특유의 장인정신에 지갑을 연다는 얘기다.

    ◆빠른 디지털화에 대비해야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는 디지털화도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아세안의 대다수 젊은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은 필수품이 됐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이용도 한국 못지 않게 활발하다. QR코드 등 다양한 결제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현금 없는 사회'로 가장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특히 아세안 대도시들의 단점인 열악한 대중교통 시스템을 기회로 삼아 그랩, 고젝, 라이드 등 십여개의 승차공유업체들이 새로운 공유경제를 구축하고 있다. 차량 뿐 아니라 식품배달, 온라인 쇼핑, 대출 등 다양한 서비스로 확장되는 추세다.
    인도네시아 최대 승차공유업체 고젝의 기사가 고객에게 커피를 배달하는 모습. <사진제공=고젝>
    ▲ 인도네시아 최대 승차공유업체 고젝의 기사가 고객에게 커피를 배달하는 모습. <사진제공=고젝>


     닛케이비즈니스는 "자동차를 구매하는 대신 필요할 때 빌려 타겠다는 소비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완성차 메이커가 협력업체를 통해 부품을 받아서 조립한 뒤 딜러를 통해 판매하는 기존 사업 전략이 더이상 먹히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이 아세안에 구축한 아성이 얼마든지 흔들릴 수 있다. 디지털화에서 아세안은 한국·일본 등이 차근차근 밟아온 단계를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변화를 읽지 못하면 그동안 아무리 잘 해왔더라도 아차 하는 순간 실패의 쓴 맛을 볼 수 있다.

    [임영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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